3. 동학(東學)운동의 영향과 신종교문화의 태동(胎動)
한국문화토양에서 자생(自生)한 새로운 사상단체와 신종교문화는 동서(東西)문화의 교류를 통해, 때로는 민족사상고취와 함양을 위해 태동되었다.
① 서세동점(西勢東漸)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부터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동학사상(東學思想)을 고취하기 위해 활동한 인물이 조선말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였다. 최제우는 동학(東學)의 창교자(創敎者)가 되었다. 그는 서학(西學)의 이치를 간파(看破)한 후 서학과 버금가는 것이 동학(東學)이라고 설명하면서 천명(天命)을 받들어 상제(上帝)의 뜻이 무엇인가를 설파(說破)했다.
최제우가 동학의 시천주(侍天主)를 교지(敎旨)로 정하고 보국안민(保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주장하며 반상(班常)의 구별을 없애고 신분평등을 주장했다.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언행에 분노한 수많은 백성들이 동학운동에 참여했다. 동학의 신도가 3000여명에 달했다. 동학의 세력은 전라ㆍ경상ㆍ충청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농민이 주축을 이룬 동학운동은 사회개혁운동으로 발전되었으나 조선의 승인 하에 입국한 러시아와 일본의 군부세력에 의해 진압되어 결국 와해되었다. 그 운동의 지도자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죄로 대구감영에서 처형당했다. 외세(外勢)는 조선왕조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고 정치적 사회적 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19세기 중반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시대였고 식민지정책에 그리스도교의 성직자가 동참(同參)했다.
② 서로마 가톨릭의 도발적인 선교(宣敎)정책과 서양세력의 통상압력 그리고 물리적 조선(朝鮮)침공(侵攻) 등은 조선사(朝鮮史)에 2대 양요(洋擾)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 1월초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침범사건)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공사건)이다. 국제적인 문화간자(間者)의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의 온갖 보물이 감춰진 곳이 강화도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두 나라의 조선침략행위를 종합해서 분석해 보면, 양국(兩國)은 17세기에 영국이 인도 및 극동 지역과의 무역촉진을 위해 설립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의 기능과 역할 등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의 뒤를 이어 미국의 물리적인 통상압력과 국정간섭 등은 조선의 국력을 점차 쇠약해지게 만들었다.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朝鮮)을 압박했으나 거절당하자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유태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게 1868(병인 丙寅)년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盜掘)하라고 시켰다. 그 도굴사건이 조선사에 '남연군 묘 도굴사건' 또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기록되었다.1)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생한 사건이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신미양요를 직역하면 신미(辛未, 1871)년에 서양(西洋)세력이 난리를 일으켜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擾)는 뜻한다. 즉 미국이 1871(辛未)년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 신미(辛未)양요다. 사건에 대한 객관성확보와 유지를 위해 노력한 조선사학자의 언어선택은 신중하였고 그의 역사적 기록은 반면교사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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