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하늘(天)사상과 종교성

6. 서교(西敎; 그리스도교)적이다 1) 한국의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그리스도교회사 ⑦ ~⑧

학담(學潭) 2019. 8. 19. 14:24

⑦ 그리스도교화(Christianization, Christianisierung)의 진행


서구 그리스도교의 신앙단체가 조선의 근대화시기에 새로운 서구문화를 전파했다. 그 반면에 한민족의 유구한 고유문화와 사상은 좌초(坐礁)의 위기를 맞이했다. 고대 단군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홍익(弘益)ㆍ홍제(弘濟)사상이 천제(天祭)사상과 더불어 발전되었고 천제문화는 유교의 천(天)사상과 제천사상으로 승계되었으나 서구 그리스도의 선교정책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조선의 종교문화경영정책의 핵심인 하늘 님(天)사상과 요순지치(堯舜之治)의 태평성대, 수신제가, 인애(仁愛)한 도덕군자, 국가적 환원 가치로서의 충(忠)ㆍ서(恕)ㆍ효(孝), 예와 실천 등은 퇴색되기 시작했다. 그러한사상은 국가교육이념으로 학습(學習)되었고 공동체사회의 가치관(價値觀)이자 덕목(德目)으로 정립되었으나 근대화라는 소용돌이 속에 흔들렸다. 유가의 안목에서 선비사상은 그러한 시대적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그 반면에 조선의 그리스도교화(Christianization, Christianisierung)는 수많은 외국의 선교사의 도움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의 유교사상이나 정치사회의 이념에는 천명ㆍ경천사상은 있으나 신의 중보자(仲保者 Mediator, Intercessor), 구원(救援), 부활(復活), 영생(永生), 천국(天國) 등의 용어가 없다. 조선의 그리스도인이 교의학을 통해 하늘 님 숭배사상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사상과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했고 색다른 테오스(그리스어 Τέως, Theos 신)세계를 발견했다. 그 신은 유일신이며 생명의 구원으로 인도하고 부활과 영생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신앙단체의 절대사상이자 유일신 신앙관을 대표하고 있다. 


새로운 Theos사상과 세계관의 특징은 신(=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데 있다. 예수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중보자(中保者)이자 신의 아들 성자(聖子)로 알려졌다. 예수신앙을 통해 누구나 다 구원(救援)받을 수 있다고 교육되었다. 그러한 메시지는 조선시대의 신분사회로 고착화된 반상(班常)의 구별을 타파하는 매개체가 되었고, 지상과 천상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호감 및 희망을 찾게 했다. 신앙인이 모이고 그의 단체가 성장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가미(加味)되어 발전했다. 신의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과 죽어서도 부활(復活)되어 천국에서 영생을 얻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교리는 구한말 시대의 신앙인에게 문자 그대로 복음이었을 것이다. 예수신앙으로써 차별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로운 세계의 복음을 찾아서 그 복음을 또한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희소식이자 인간 평등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심은 모임장소와 기도장소를 바꾸게 만들었다. 예전부터 장독대 위에 정화수(井華水, 일명 청수淸水)를 떠 놓고 북두칠성(北斗七星)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염원하며 치성(致誠)을 올렸던 신앙심이 점차 교회로 옮겨졌다. 희구(希求)하고 갈구(渴求)하며 빌고 빌었던 기원(祈願)의 범위와 내용들은 큰 틀에서 변하지 않았으나, 오직 기도의 대상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고 찬송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고 몸부림친 것은 또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그와 같은 시대를 거쳐서 성장된 한국 개신교는 일반인에게 긍정적이었고 사회적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반면에 일제의 야욕으로 희생된 수많은 양민(良民)과 부지기수의 유명, 무명의 독립운동가들, 강제노동으로 징병된 조선의 청년들, 위안부(慰安婦)할머니 분들의 한 맺힌 탄원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다. 그들의 영혼들은 구천(九天)을 떠돌며 맴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국민정부의 차원 높은 이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관심, 배려, 진실규명운동과 사회적 참여의식 등은 한국사회의 미래를 보다 건강하고 밝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⑧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 친미(親美)주의 태동


1945년 광복(光復)을 맞이한 한국은 국권(國權)회복의 기회를 맞이하였고 일제로부터 해방이라는 기쁨을 잠시 누렸다. 하지만 남한에는 미군군정(軍政)이, 북한에는 구(舊)소련 군정이 주둔(駐屯)하고 있었다. 군정은 그자 그대로 군(軍)부가 정(政)치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남한의 이승만 정권과 북한의 김일성 정권으로 분리되었다. 남한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의 국명으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이름으로 분단되었다. 


강대국의 정치개입으로 발생된 남북한의 극단적인 이념논쟁은 국가경영철학을 하나로 통합시키지 못했고 국내정치인들의 야욕은 국가보다 개인의 안위를 챙기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오히려 친일파를 등용시켰다. 그로 인해 수많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와 그의 가족들이 국가와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되는 불운의 시기를 가슴에 안고 살았다. 


엎 친데 덮친다는 말처럼 한국전쟁(1950~1953)의 참혹사(慘酷史)는 세계사에 유래 없는 전쟁사로 기록되어 있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도중에 사망했고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아사(餓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수백만 명이 처참하게 희생당했고 황무지처럼 파괴된 국토는 복구의 손길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피해복구가 미국의 원조에 의해 진행되었으나 문제가 발생했다. 


일제식민사관과 친일파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시 새로운 미국문화의 이식(移植)이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친미주의의 배경 속에 진행되면서 또 다시 새로운 문화식민사관이 태동했다. 북한과 달리 친일파청산에 미온적인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미군군정에 협조적이었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배척당했다. 왜 그러한 상황이 전개 되었고, 그들 중에 일부는 왜 월북(越北)했는가? 그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자하는 국민의 열망에 따라 전문가의 연구결과물은 나오고 있으나 아직도 미흡한 상황에 처해있어 통합적인 정신으로 이끄는 화해와 평화는 시대적 과제다. 


1950년 7월 14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맥아더 극동사령관 겸 UN군 사령관에 한국군의 지휘권을 위임하면서부터 대한민국의 전시작전통제권(약칭, 전작권; Wartime Operational Control; OPCON)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1979년에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ROK-US Combined Forces Command; CFC)가 전작권을 행사하고 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전작권을 조기 환수하겠다고 했다. 국가경영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전시작전통제권이며 그것은 자주적인 국가위상과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지켜주는데 필수불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