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하늘(天)사상과 종교성

6. 서교(西敎; 그리스도교)적이다 1) 한국의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그리스도교회사 ⑨ ~⑩

학담(學潭) 2019. 8. 19. 14:26

⑨ 산업화와 그리스도교화


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은 결과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타도시켰고 제 2공화국인 장면(張勉)의 내각제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박정희 소장에 의해 군사 쿠데타(coup d'Etat)가 일어났고 군사혁명위원회'(軍事革命委員會)가 조직되었다. 그 조직은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로 개칭되었고 제 2공화국의 시대는 역사 속에 사라지면서 제 3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제 3공화국에서 새로운 정치적 공학관계로 추진된 범사회적 운동이 새마을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이 국가경영시스템과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농경문화의 체제를 산업화시대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면서 생활문화의 양상(pattern)이 점차 바뀌게 되었다. 산업화시대를 맞이하여 농촌의 사람들이 보다 잘 살아보자는 희망과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대도시 서울로 집중되었다. 


산업화시대의 도시인구집중은 대표적 사회현상이자 문화현상이다. 그 시대의 사회문화현상으로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여러 신앙단체의 등장이었다. 신앙단체는 무엇보다도 먼저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장소가 되었다. 그 가운데 대도시에 형성된 그리스도교회는 고향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장소, 타향사람들과의 사교의 장소, 사업과 사회진출 및 정보교환 등의 기능을 담당했다. 그와 같은 역할은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는 정신적 매개체가 되었다. 그 당시 삶의 현장문화를 중요시한 그리스도교의 소통경영은 사람들의 호응 속에 성공적이었다. 미국과 유럽진출을 안내하는 해외창구로서의 역할도 그리스도교가 담당하였고 그와 더불어 활성화되었다. 


농촌에 남은 어르신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마을 곳곳마다 세워진 교회에서 자녀들의 건강, 안위, 성공 등을 염원하며 빌었다.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는 스스로 탈(脫)유교문화권의 상징이자 서구 신문화와 사상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단체로서 인재교육과 인재발굴의 기능을 발휘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신지식인으로 활동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인은 인적(人的) 네트워크를 구성하였고 나름대로의 조직체는 세력화되었다. 1980년도 중반까지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세계교회사에서도 눈여겨볼 정도로 경이적이었다. 그 당시 실시한 종교인구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30%가 그리스도인이었다.19)



⑩ 서로마 한국 가톨릭 - 문화상황화속의 정치화


기미(己未, 1919)년 3월 1일 비폭력 평화시위가 거족적(擧族的)이고 구국적(救國的)인 차원에서 대한독립만세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 운동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염원에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선언으로 이어졌고 차후 삼일운동(三一運動)으로 약칭되었다.


삼일만세운동 때 여러 단체와 인물들이 참여했으나 한국의 서로마 가톨릭은 동참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국 가톨릭은 한국사회의 외면 속에 장기간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톨릭 신자 수는 1960년대 종교인구조사통계에 의하면 총인구의 0.4%였다. 1963년 한국의 가톨릭은 그동안 난해한 문제로 대두(擡頭)되어 왔던 조상숭배를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정하고 허용하라는 로마교황청의 특별교지를 받았다. 서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세계적 시대상황변화와 종교문화의 조화와 동화의 과정이 한국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그 당시 한국 가톨릭이 미사(missa)를 올릴 때, 중요한 원어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는 라틴어가 종종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라틴어 사용이 현저하게 줄었다.  


1974년 사회와 정치에 참여하고자 형성된 가톨릭단체가 ‘정의사제구현단(正義司祭具現團)’이다. 이는 한국의 가톨릭교회 사제들로 구성된 단체이나 한국 가톨릭교회의 하위조직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 가톨릭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대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