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종교문화경영(지도자)학 – 보편적 사회 가치 창출과 환원

5) 일본의 그리스도교문화와 한국교회사

학담(學潭) 2022. 3. 7. 14:46

임진왜란(1592~1598)이 발생하기 약 30년 전 일본은 포르투갈 (Portugal)의 무역 상인들과 교역할 기회를 맞이했다. 1543년 동방〔인도, 실론, 인도네시아의 중부 말루쿠 제도(Maluku Islands)〕에서 생산되는 향신료 〔후추ㆍ육두구(肉荳蔲, nutmeg)ㆍ생강ㆍ클로버〕를 찾아 떠난 포르투갈 선박 이 태풍에 휩쓸려 일본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漂着)했다. 이로 인해 일본과 포르투갈 상인과의 역사적 만남은 시작되었다. 그 후 포르투갈의 예수회 조직이 일본에 들어왔고 서로 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했다.

문물교류 중에는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 신무기(=조 총)도 포함되어 있다. 이로 인해 조총을 만드는 일본의 기술이 발전되어 일본의 조총부대는 조직화하였다. 일본의 신문화에 여러 형태의 가톨릭 문화요소가 혼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널리 알려진 영화 『쇼군 (Shogun, 將軍)』에서 발견할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 신부 세스페데 스(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가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가톨릭 교 인인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의 종군 (從軍) 신부(神父)로 약 1년 6개월 동안 활동했다. 그 후 가톨릭은 자국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일본의 정치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관계가 소연(蕭然) 해지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인의 숫자는 개신교와 가톨릭 포함하여 대략 100만 명 이하로 전체인구의 1%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그리스도교인의 신자 수 구성 (비율)이 약100년 전이나 오늘날에도 큰 변동이 없는 것은 총인구수를 대비한 것이다.

근대화 시기에 서구의 선교정책과 식민지정책세력이 동진(東進)하여 청나라와 조선에 이르렀다.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있던 일본제국은 영국에서 구매한 포함(砲艦)을 정비하여 해군의 포함 이름을 운요호(雲揚號)라 고 했다. 1875년 일제는 운요호(雲揚號)를 몰고 와서 강화도 지역을 파괴 하고 살인·방화·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한 국토침략과 악행이 조선사 에 ‘운요호사건’ 또는 강화도사건(江華島事件)으로 기록되었다.

1871년 신 미양요(辛未洋擾)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1876년 조선은 일본의 강압 때문에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그 조약은 결과적으로 일본이 조선의 국정에 직·간접적으로 간섭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조선의 국력은 외세의 영향에 의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국 개신교회사에 의하면, 일본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개신교 신 자가 된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은 바이블 신약을 최초로 번역하여 조선 신앙인에게 보급했다. 그는 1882년 2차 조사사찰단〔朝士視察團, 일본 에서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기록〕 수신사(修信使) 박영효의 비 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

이수정은 그곳에서 일본 농학자(農學者)이 자 개신교 신자 쓰다 센(津田仙)을 만나 바이블 공부를 했다. 1883년 이수 정은 야스가와(安川亭) 목사(牧師)의 입회하에 도쿄 노월정교회(露月町 敎會, 현 芝敎會-시바 교회)에서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 녹스(G. W. Knox)에 게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이 바이블 신약 마태전(馬太傳)을 한문으로 번역 하고 중간마다 이두문자로 토를 달아 야소(耶蘇) 강생 1884년에 편찬(編 纂)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야소교라고 표현하고 기록한 것은 한국 그리스도교 사의 원형을 이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한다.

이수정의 신약 바이블 번역은 미국 바이블공회 일본지회 총무였던 루미스(Henry Loomis)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루어졌다. 1887년 심양(瀋陽, Shenyang)에서 ‘예수성교전서’가 이수정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미국의 개신교 선교정책은 조선의 개신교 복음화를 위한 후학양성과 더불어 인재경영에 큰 관 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조선의 지식인 들이 근대화 시기에 야소교((耶蘇敎), 즉 서교(西敎) 사상을 받아들여 서 교의 종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후학 한국 신학사상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