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열강의 식민지정책은 문호개방정책(門戶開放政策, Open Door Policy)4)이라는 미명(美名)아래 감추어졌다. 문호개방정책의 실시는 급격하게 몰아닥친 근대화시기에 한국 전통문화와 서구 근대문화의 충돌을 발생시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고 또 부추겼다. 그러한 급격하고 혹독한 변화시대의 와중(渦中)에서도 불구하고 조선의 수많은 백성은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오늘날 유교의 의례와 윤리 도덕적 사회체제 그리고 제례문화는 공동체사회문화에서 발견된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漢陽)은 지금도 500여년의 옛 모습을 복원시켜가며 향후 미래 500년의 수도를 지향하기 위한 문화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세계의 다양한 여행객들이 역동적인 서울의 문화와 풍경을 관광하고 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가족과 여러 집단에서의 인간관계와 질서체제는 유교의 윤리, 도덕적인 삶의 바탕에 있으며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로 성장하고 있다. 유교의 덕치(德治)로 불리는 충효(忠孝)와 충서(忠恕)사상 그리고 보편화된 조상제례는 한국사회에 유구히 전래되고 있고 한국불교 뿐만 아니라 다른 신앙단체도 조상제례를 미풍양속의 이름하에 수용하고 있다.
유교적인 사회체제와 질서를 한국 그리스도교가 수용했다고 하나 유교를 모르는 서구 그리스도교의 사회문화에도 유교사회질서의 핵심인 충서(忠恕)와 효(孝)가 존재한다. 예수의 박애(博愛)사상과 원수사랑 그리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것은 동서고금에도 동일한 가르침으로 제시된 보편적 차원의 진리다.
⑮ 한국 그리스도교 가운데 서로마 가톨릭이 1970년대부터 기존 토착문화와의 동화를 위해 유교의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사풍습으로서 3일장, 결혼식 때 폐백(幣帛)의례, 개신교의 추도(追悼)예배, 가톨릭의 상ㆍ제례(喪ㆍ祭禮) 등으로 구분되었다.5)
개신교와 가톨릭은 제례 때 바이블의 구약과 신약에서 적합한 내용의 구절을 찾아 인용하면서 부활의 믿음을 설명하고 주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 기도는 가톨릭에서 위령기도6)라고 하며 참석한 사람 중에 가장(家長) 또는 선임(先任)자가 대표로 향을 피우고난 다음에 다함께 큰절을 두 번 한다.
한국의 서로마 가톨릭차원에서 행하고자 하는 다양한 의례 등이 한국문화와 비교 검토되고 접목되어 가톨릭 사목(司牧)의 방향이 설정되었다. 한국 서로마가톨릭은 1990년도에 개신교의 추도식에 버금가는 조상제례를 주님의 이름으로 단행하면서 신앙인은 물론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대적 변화와 상황이 종교문화경영학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의 제례문화가 외연적인 확보차원에서 문화동화의 과정을 이끌었다고 본다.
⑯ 오늘날 조상제례가 한국의 사회와 그리스도교 및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이해되었는가에 대한 밝혀보고자 한다.
1990년대 필자가 유럽에서 조상제례에 대해 교민들과 인터뷰와 설문지를 통해 분석해 보았고 그 후 2000년도에도 한국에서 그에 대해 다시 연구해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제례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개신교의 신자들 중에 일부는 유교식 제례를 지내기도 하며, 일부는 제사에 참여하지만 개신교의 추도식순(追悼式順)에 따라 고인(故人)이나 조상께 절하지 않고 목례(目禮)로 대신한다. 그들은 조상제례를 단순히 우상숭배로 생각하고 금기할 사항이 아니라 십계명(十誡命)에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많은 목사와 신도가 민족전통의 명절을 지키는 것과 조상제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개신교의 토착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유교의 관혼상제뿐만 아니라 공동체사회와 정치, 교육문화에서도 유교의 긍정적인 가르침과 사회적 덕목의 요소는 한국인의 일상생활문화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인의 종교(심)성은 유교적이며 특히 유교의 종묘제례(宗廟祭禮),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와 같은 사례는 한국인의 종교성이 유고문화와 융화되어 있다는 반증이자 국가차원에서의 종교문화경영학은 세계적인 유네스코이념과 무관하지 않아 폭넓은 연구 분야로 발전되어야 한다.
각주(참고문헌)
1) 사서(四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 오경(五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2) 10. 종교문화경영의 10단계 – 문화조화(文化調化 culture harmonization) 2) 다이어그램(diagram) 14 – ~문화조화(文化調和) ㈒ 화쟁사상(和諍思想)과 문화융화(融和) 참조바람
3)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총지휘하는 동학의 세력에 전라도ㆍ충청도 일대의 농민이 참가하여 그 세력은 왕성해졌고, 탐관오리(貪官汚吏)척결을 위한 순수 농민운동으로 번졌으나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로 커졌다. 근대사회의 변혁기를 맞이한 조선의 정치적 당면과제는 동학세력을 잠재우는 것 외에도 열강세력과의 대립관계를 풀어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로써 전통문화와 서구 근대문화의 충돌(衝突)은 보수문화의 존치(存置)와 병존(竝存)과정을 넘어 왕조시대의 국난(國難)으로 번져가면서 위기(危機)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선의 유교정치이념과 체제가 서구 나라의 무력도발과 일본의 조선침략이 구체화되면서 격랑(激浪)의 세월을 맞이한다. 조선은 정치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자 국력 또한 쇠약(衰弱)해지면서 외세에 의한 급격한 체제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동학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진주(進駐)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결과적으로 최수운이 참형되고 전봉준이 죽임을 당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동학혁명 이후 동양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청ㆍ일 전쟁(1894~1895)이 일어났고 일본이 승자(勝者)가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에게 동학농민운동저지비용과 전쟁자금지불을 강요했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미미한 조선은 점점 더 깊게 노골적으로 침투하는 일본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으나 역부족(力不足)이였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한 조선의 국가경영능력이 무력해 지면서 외세에 의존하다보니 조선의 땅은 외세의 격전지가 되었고 국가 통치권까지 몰수당해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했다.
4)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촉구는 1899년 미국의 국무 장관 헤이(Hay, John Milton)가 주장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의 기본원칙을 수립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5)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상ㆍ제례(喪ㆍ祭禮)에 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은 이 책의 제 8장 13. 종교문화경영의 13단계 – 문화토착화(文化土着化, cultura indigenization, culture indigenization), 2) 한국 개신교의 토착화에 대한 논쟁과 문제, 3) 한국 가톨릭의 토착화와 문제점 참조바람
6) ‘위령기도서’는 현재 임종기도, 사자(死者)를 위한 기도, 기일, 위령 기도, 차례 예식 등에 사용되고 있다. 부록에 병자방문기도와 장례미사, 이장예식 등이 들어 있다.
'제 3장 하늘(天)사상과 종교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불교(佛敎)적이다 ②~③ (0) | 2019.08.19 |
---|---|
4. 불교(佛敎)적이다 ① (0) | 2019.08.19 |
유교적이다 ⑪ ~ ⑬ (0) | 2019.08.18 |
유교적이다 ⑧~⑩ (0) | 2019.08.18 |
유교적이다 ⑥~⑦ (0) | 2019.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