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하늘(天)사상과 종교성

6. 서교(西敎; 그리스도교)적이다 1) 한국의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그리스도교회사 ⑬ ~⑭

학담(學潭) 2019. 8. 19. 14:29

⑬ 가톨릭의 친일행위와 일제의 105인 허위조작사건

 

안중근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의 사촌 동생 안명근(安明根, 1879~1927, 세례 명 야고보) 또한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안명근은 만주(滿洲)지역에 항일독립운동기지가 설립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넣었다. 그가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은 1911년 6월에 신흥중학(=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가 일본군에 의해 체포당한 것은 그 당시 조선 가톨릭의 친일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그리스도교의 반민족행위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필요하며 역사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사안이다.

안명근은 빌헬름 신부를 믿고 그에게 신앙고백을 했다. 빌헬름 신부가 안명근과 조선인들이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Terauchi Masatake, 1852~1919)총독을 척살(擲殺)하려는 계획을 파악했다. 그는 즉시 그러한 정보를 서신으로 대주교 뮈텔에게 보냈다. 뮈텔이 급히 총독부 경무총장(아카보 장군)을 찾아가 안명근의 거사계획을 알려주었다. 안명근은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며 일제는 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들을 색출하고자 혈안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 일제는 1911년 9월 전국적으로 무고한 백성 600여명을 검거하면서 비밀항일단체 신민회(新民會)24)의 실체를 파악했다. 그중에 123명이 심한 고문을 당했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동년 9월 28일 제1심 공판 판결에서 18명은 풀려났고 나머지 105명은 검사 측의 구형한 형량그대로 징역 5~10년의 유죄판결을 받아 일명 ‘105인 사건’25)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허위로 조작된 105인 사건으로 인해 국내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조직이 와해(瓦解)되었다. 

 

 

⑭ 선민(選民)의식과 한국샤머니즘사상과의 혼재성

 

허락된 신앙의 자유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서구 식민지사상과 지배세력의 입장은 보편적인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제식민지 시대에 암묵적인 정치적 후원을 등에 업은 그리스도교의 단체와 세력은 사회 전반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선교정책은 한국에서 그리스도교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한국 그리스도교연합회가 그리스도교화의 선교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그 당시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선민(選民)의식과 우월감을 지닌 신지식인의 길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그러한 형국은 다양한 부분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비록 그들의 '엘리트 의식'은 오늘에 이르러 많이 퇴색되었으나 한국그리스도교의 존재감과 사회적 영향력 그리고 순기능적 역할은 과소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으며 그들만의 선민(選民)공동체의식은 존재하고 있다. 

 

서구 근대문화의 물결은 그리스도교회의 미신타파운동, 전통문화배격과 서양문화옹호 등으로 이어졌다. 누천년 동안 찬란하게 빛난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말살되어가는 과정에서 일제의 온갖 만행과 조선 총독부의 폭정은 커져만 갔다. 조선총독부의 촉탁(囑託)직원으로 임명된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이 한국의 민간사상과 문화를 미신으로 단정하고 쓴 책명이 『조선(朝鮮)의 귀신(鬼神)』이다. 

 

일제식민주의 정책과 연관된 문화정책이 그를 통해 본격화되었다. 유구한 전통문화가 구한말의 조선시대에 샤머니즘이라는 오명(汚名)을 뒤집어쓰고 끝없는 나락(奈落)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스도교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샤머니즘과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미신타파운동을 전개했다. 그 운동은 서구 근대문화를 취사선택 없이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한국 그리스도교의 슬로건(slogan)이었고 그 운동에 한국 그리스도교의 교인이 앞장섰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근대화시기에 불운의 시기를 맞이했다. 장기간의 세월 동안 한국의 고유문화가 미신으로 전락(轉落)되어 저속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置簿)되어 문화의 저변으로 내팽겨졌고 외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외면당하고 있던 한국문화가 선별과정을 거쳐 1984년 아시안 게임, LA올림픽, 88년 한국 서울올림픽, 2004년 월드컵유치 등을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로 세계인들에게 안내되었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문화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는 물론 지금도 한국 그리스도교의 문화가 한국은 물론 세계인에게도 한국의 고유문화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한국을 대표하는 신앙단체라고 국제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사회적으로 그 역사성이 짧고 한국문화토양에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문화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공감을 줄 수 있는 혁신적이고 새로운 요소가 없거나 미진하다고 본다. 그리스도교문화의 원류가 유럽인데 유럽인이 한국 그리스도교문화에서 배울 것은 물론 없겠으나 독특한 점으로 발견한 것이 한국샤머니즘사상과의 혼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