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종교문화경영(지도자)학 – 보편적 사회 가치 창출과 환원

2) 동ㆍ서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화(1)

학담(學潭) 2022. 3. 7. 12:43

 로마 대제국의 정신적·정치적 통합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 체론 수용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이론은 제국의 통치이념이자 수단이 되었다.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종교회의(=니케아 공의회 Concilium Nicaenum Primum)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인정하 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파를 정통으로 인정했고, 그를 부정하는 아리 우스(Arius)파를 이단으로 규정해서 강제로 몰아냈다.

삼위일체론이 그리스 도교의 교리를 대표하는 니케아(Nicaea, 현재터키의 이즈니크) 신조가 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 만, 정통과 이단의 논쟁은 격화되어 차후 수많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정치권과 연계된 니케아 신조의 신봉자들과 다른 여러그리스도교종 파2 사이에 삼위일체론에 대한 날카로운 논쟁과 적대관계가 형성되었다.

380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47~395)는 이교(異敎)와 그리스도교의 분파 중 하나인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定罪)하고, 니 케아 신조 하나만 갖도록 규정한 칙령을 발표했다. 니케아 신조는 381년 교 회의 승인을 받은 후 삼위일체론을 신봉하는 신앙인만 그리스도인으로 간주(看做)했다. 그 신조는 분열된 예수 사상을 하나의 교리로 수습하고 로 마 대제국의 정치이념이자 그리스도화의 지표가 되었다.

예수 사상은 로마 황제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매개체가 되면서 로 마 황제는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보편교회(universal church)를 지향한다는 차원에서 보편교회주의와 공교회주의라고 하였다. 보편교회는 차후 공의회(公議會, Concilium)를 통해 가톨릭시즘(Catholicism)이라고 불 렸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가톨릭시즘(Catholicism)은 제도적으로 유일신 신앙단체, 유일한 신앙단체(religion)로 전환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 전 쟁의 신 여호와와 연계된 예수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신조는 로마 대제국 의 국가경영철학과 융화되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광대한 로마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수도(首都)를 서로마에서 동로마 지역의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오늘날의 이스탄불)으로 옮겼다.

395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재위 379-395) 황제가 그의 장 자 아르카디우스(Arcadius 377/378 ~ 408)에게 동로마를, 차남 호노리우스 (Honorius 384~423)에게 서로마를 통치하게 했다. 동ㆍ서로마제국이 분리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 후 동ㆍ서로마의 교황이 각각 추대되어 2명의 교황이 그리스도교 대 제국에 존재했다. 전자는 동로마 가톨릭교회로 오늘날 동방정교회(東方正 敎會, Eastern Orthodoxy), 후자는 서로마가톨릭교회가 되었다.

유럽 동부지 역에 있는 동로마 가톨릭 제국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이스탄불) 을 중심으로 약 1000년 동안 찬란한 비잔틴문화를 발전시켜 비잔티움제국 (Byzantine Empire)이라고 했다. 동로마 가톨릭 제국은 고대 그리스, 로마 그 리고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시켜 독특한 비잔틴 미술문화〔둥근 지붕(dome)를 발전시켰고, 그리스 정교회(正敎會)의 본산이 되 었다. 동로마 가톨릭 제국의 문화는 종교문화의 습합 사상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문화경영은 동유럽의 문화토착화를 조성했다. 동로마 비잔티움제국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제국〔Osman Türk 제국(帝國)〕에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