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종교문화경영(지도자)학 – 보편적 사회 가치 창출과 환원

2. 역사 인식과 종교문화경영 – 종교(심)성 탐구에서부터

학담(學潭) 2022. 3. 7. 14:04

고조선을 건국한 초대 단군 대황조(檀君大皇祖)의 개천(開天)사상과 개국(開國)이념으로 제시된 국시(國是)는 홍익인간ㆍ제세이화이다. 전 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단군의 개천사상과 이념이다. 단군 대황조가 인류의 스승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 기에 있다. 단군의 국시는 인류의 교육이념이자 평화사상으로서 타문화를 배려하며 상호 간의 공익과 공존을 위해 조화롭게 융화시켜 창조적으로 성장ㆍ발전시킨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문화선진강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고조선의 역사와 전통문화, 정신사상을 승계한 것이다. 세계의 종교문화는 나라마다 각국의 시대 상황에 따라 발전적인 변화를 거듭하면서 국가와 국민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나아가는 데 필요한 국정운영과 국가경영철학 에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홍익(弘益)ㆍ홍제(弘濟)라는 개념을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적인 문제가 발생하거나 그에 연관된 사회적 현 상을 직시하고 표현할 때 단군(檀君) 이래 무엇이 어떠어떠하다고 자연스 럽게 글과 말로 표현한다. 그만큼 한국인의 종교성은 역사적 단군의 자손 으로 의식·무의식적으로 단군의 사상과 문화에 영향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단군의 ‘홍익인간’ 개념이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으로 어떻게 정해졌는가에 관한 질문은 당연하지만, 고대 단군의 역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 이다. 서지학(書誌學, bibliography)적 안목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고조선 과 고조선 이전의 선사(先史)시대를 입증할 상고사(上古史)의 결정적인 문헌고증(文獻考證) 자료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고대의 단군(檀 君) 역사를 실사(實史)로 인정하지 않고 단군신화(檀君神話)라고 주장한다.

단군신화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주로 많이 사용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고대문화전문가들은 5천 년 이상 약 1만 년 전의 국가 존재에 관한 서지학적 입증자료가 없다고 인류의 고대문화와 문명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입증자료가 다양한 형태의 고대문화와 문화재 가 대신하고 있으므로 특히 고고학자들의 입장은 포괄적이고 개방적이다.

 

문화적 의미에서 신화의 존재는 오직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사상누각(砂上樓閣)이거나 허구(虛構)라고만 말할 수 없으며, 어떠한 역사적 사례 (事例)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한국 고대신화와 신화 같은 존재가 고대사 (古代史)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어떠한 형태로든 역사적 흐름과 사상적 배경·영향 등을 설명한 것이다. 신화에서 역사로 이어지는 인식과 연구가 필요하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삼국시대의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 면서 한민족의 상고사(上古史)를 알려주는 국조 단군 시대의 문헌과 유적 들이 불타 버리고 소멸하였으며, 그 후에도 남겨진 자료들이 수많은 전쟁 속에 강탈되고 파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학자는 주변국 명 (明)과 청(淸)나라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고대사, 과학기술, 고유문화를 연 구할 수 없는 시대를 겪었다.

한국의 고조선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었다. 그나마 남겨진 다양하고 중요한 한민족의 문화재가 근대화 시기에 약탈당했고, 일제 강점기 시대에 다시 도난당해 해외로 유출되었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역 사를 잃어버린 한민족은 국민적 자긍심 상실과 내일의 희망과 비전을 설정 할 수 없어 이리저리 방황했다. 한국인은 민족정신을 살리는 올바른 역사 교육을 받지 못했다. 점차 민족의 정체성과 구심점이 와해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문화가 새 시대의 신문화로 등장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민족의 정체성과 사상이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념분쟁이 발생하였고, 또다시 미국과 소련의 세력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남한에는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 部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약칭 미 군정청(美軍政廳, USAMGIK)이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에 주둔했다 (1945.9.8.~1948.8.15). 미 군정은 한국의 국정운영에도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한에는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형성될 때까 지 소련군이 군정을 담당했다(1945.9.8~1948.9.9).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주 4ㆍ3 봉기와 10월 여순사건을 무력 으로 진압했고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좌익(左翼)으로 간주했으며, 12 월에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자칭 좌익세력(독립운동가와 그의 유족 포함)을 처형했다. 그는 1949년 10월에는 좌익세력의 색출ㆍ 통제ㆍ회유, 공산주의 타도 등을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을 만들어 미군의 협조 하에 빨치산 토벌 작전을 단행했으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수년 전에 미국의 문서성에서 기밀문서해제로 널리 알려진 한국의 국민보도연맹의 양민학살과 사진 자료들은 국민 보도연맹사건(國 民保導聯盟事件)이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대처하고 다루어야 한다.

 

1950년 1월 12일 D. G. 애치슨(Acheson) 미국 국무장관이 미국의 극 동방위선을 설정하고 그 방위선에서 한국을 배제했다. 그가 발표한 선언이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기 회를 제공했다. 동년 6월 25일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勃發)했고, 그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전쟁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수많은 생명이 고통스럽고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그러한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한국 선교정책은 성공적이었다.

미국문화의 영향력과 배경 속에 어느덧 마을 구석구석까지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 그리스도교인은 교회에서 지급하는 구호물자(救護物資)를 받았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학문은 미신이자 구시대의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 해 방치되어, 그리스도교 사상과 문화에 잠식되었다. 그 사상과 문화는 한 국 그리스도인에게 신지식인과 엘리트 의식을 고취해주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이끄는 한국교육의 방향과 국가경영의 철 학이 모호해지고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부침(浮沈)되어 가면서 주체 성과 정체성이 상실되기 시작했다.

 

서구문화와 물신(物神)이 만연한 사회에서 자아정체성의 상처(傷處)와 손상(損傷)은 깊어졌고, 새로운 계급사 회와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가면서 여러 분야에서의 갈등(葛藤)과 분란(紛 亂)의 소지(素地)도 만연되었다. 한국전쟁 후 한국은 세계 최대의 빈민국(貧民國)이었으나 국민의 피 땀으로 한강을 기적을 일구어냈다.

양적으로 팽창한 한국경제 규모는 2006년 세계 10위권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병든 사회의 치유와 회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국가적 과제로 남겨졌다. 2019년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 11일) 100년을 맞이 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국민(國民)을 진정 대한(大韓)으로 길이 보존 할 수 있는 국가경영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홍익ㆍ홍제 사상, 풍류(風 流)와 중명(重明) 사상, 자비(慈悲) 사상, 충서(忠恕)·솔성(率性) 사상 등 은 각각 그 시대의 국가경영철학이자 교육이념이며 종교문화경영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종교문화경영의 핵심은 국민총화(總和)를 이루는 국가경영의 중요사상이자 교육이념인 동시에 사회적 실천 강령의 대의(大義)에 있다. 이 단락에서는 고대 단군 시대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는 선교(仙 敎) 사상에서부터 조선의 근대화 시기에 유입된 서교(西敎, 그리스도교)와 그 외의 신앙단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상적 맥락을 종교문화경영의 관 점에서 중점적으로 밝혀본다. 또 그 외 이웃 나라 정치종교사회문화와의 변화와 영향은 어떠하였는지 종교성 탐구의 차원에서 주요 핵심만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