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한국 - 일본과 미국
세계의 근대화시기에 조선(=大韓帝國)은 열강의 침략과 외세(外勢)로 인해 국력이 쇠약(衰弱)해졌고 유구한 전통문화와 근대문화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日帝)의 강압으로 체결된 2차 한일협약 즉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후 일제(日帝)의 문화이식의 칼날은 대한제국의 심장부를 겨누었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대한제국의 국권(외교권)이 침탈당했다. 망국(亡國)의 상징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1910년 8월 29일 한양(漢陽, 오늘날 광화문 부근)에 설치되었다. 결국 한민족의 전통문화는 먼저 서로마 가톨릭문화와 충돌을 경험했으나 일제문화와의 충돌을 극복하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물리적인 문화이식이 전개되어 폭발적인 사회적 혼란과 민족의 통한은 깊어만 갔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한민족의 고대사와 근대사를 왜곡(歪曲)하면서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생명권을 강탈했고 생활권과 강토를 무참하게 유린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1910~1918년에 이르기까지 ‘조선토지조사사업(朝鮮土地調査事業)’은 토지소유권ㆍ토지가격ㆍ지형지모(地形地貌)를 조사한 것이었다. 강제성과 물리력이 동원된 일본의 사업정책은 조선의 토지제도와 지세(地稅)제도를 체계화시켜 식민통치를 원활하도록 만들게 하는 기초 작업이 되었다. 그 제도는 결국 조선 지주들의 토지를 약탈했고 토지소유권을 일본인에게 넘겨주도록 만들었다. 토지점유권이 상실된 조선의 농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소작인(小作人)으로 둔갑되어 참혹하고도 무참하게 착취당했다. 다양하고도 야비한 일본의 약탈(掠奪)행위와 악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혹독한 일제의 압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힘없는 조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여러 사상단체와 신앙단체를 회유(懷柔)하며 겁박(劫迫)하기 시작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교단들이 일본의 집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강요와 압력 및 탄압에 무릎을 꿇었다. 안식교단과 성결교단은 1935년 12월에 신사참배를 결정했고 가톨릭은 1936년 5월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신사참배를 시행했다. 1938년 2월 6일 조선예수교 장로회 평북노회가, 9월에는 감리교와 전국 장로회총회에서 23노회 중 17노회가 신사참배를 찬성했다. 그러한 와중에도 개신교단의 일부 신앙인들은 신사참배거부운동(=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을 하다가 옥고(獄苦)를 치르거나 옥사(獄死)했다.
조선의 민족문화가 일제 식민지사관에 의해 샤머니즘의 문화로 둔갑되기 시작했다.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1891~1968)이 쓴 『조선(朝鮮)의 귀신(鬼神)』은 그 당시에 출판된 책이다. 조선의 역사(歷史)왜곡은 물론 조선인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황국신민교육(皇國臣民敎育)을 받았다. 일본은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했고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강요했다. 한국문화와 한국어 말살정책이 공동체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문화재가 강탈당했고, 강제로 징병된 사람, 노동인력으로 차출된 사람,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했다.
2015년에 처음 개봉된 영화 ‘귀향(歸鄕)’은 위안부의 진상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데 다소 나마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늘도 주도적인 세력을 거머쥐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은 위안부의 존재는 없었다고 강조하며 소녀상철거를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 2016년 3월 그 당시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본의 검정교과서 77%가 한국고유의 영토인 독도(獨島)를 일본 땅으로 표시하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독도영유권분쟁을 국제사회의 이슈로 표면화시키고 있다. 일방적이고 노골적인 일본의 정치ㆍ교육문화는 한국역사를 지속적으로 왜곡하고 있어 특히 일본학생들에 대한 교육문화이식의 저변에는 또 다른 야욕과 욕망의 밑그림을 그리게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아직도 일본문화가 잔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장기간의 문화이식의 영향력이 얼마나 다양한 부분에서 막강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문화이식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전통문화와 교묘(巧妙)한 융화를 통해 현대사회의 문화로 존재하는 경우, 그렇게 이식된 문화는 변용(變容)되어 명맥을 이어갈 수는 있겠으나 한정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의외로 토착문화와의 융화과정에서 다소 유전자변형과 같은 기형적인 사회문화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에 의해 무참하게 쓰러진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승계한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이름으로 유구한 국가의 혼과 정통성을 이어갔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국의 군정(軍政)이 들어서면서 일본에 이어 또다시 미국문화의 이식을 직ㆍ간접적으로 강요당했다. 그리스의 헬레니즘이 번창하였듯이 한국에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색다른 문화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일본문화의 흔적이 아직 지워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메리카니즘의 세파가 한민족의 문화와 민족의 정체성을 강타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과 미국의 다양한 영향력은 아직도 건재하다. 한국인이 한민족의 유구하고 찬란한 문화를 승계하였으나 국치로 기록된 쓰라린 역사적 과거를 국가혁신경영의 차원에서 바르게 이해하고 성찰해야 마땅하다. 국가와 국민이 일본과 미국의 문화이식의 후유증과 잔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확히 분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잘못된 과거사가 방치되고 있다. 기술적으로 새롭게 변종된 문화이식의 바이러스가 항상 대기하고 침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사례 등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이 한국 국민들께 교육적인 차원에서 조금씩 제시되고 있는 것은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나 앞으로 해결할 문제가 태산처럼 산적(散積)되었다. 한국정치와 교육문화의 선진화가 미진하고 통찰적인 국제적 문화경영이 부재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고 본다.
한국 가톨릭출판사와 대한기독교출판사에서 출간된 책 중에 한국교회사에 관한 책들이 있다. 그러한 서적에서 누구나 살펴볼 수 있듯이, 조선은 서구의 선교사와 조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 그리고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국제적인 사안들을 통해 문화적 충돌과 전쟁 등을 경험했다. 조선의 근대화시기에 미국의 개신교 교단은 조선의 문화를 여러 분야에서 치밀하게 분석했다. 분석된 자료가 선교(宣敎)정책에 반영되어 다양한 문화경영과 관리의 차원에서 활용되었다. 미국 개신교의 한국선교문화정책은 정치사회문화경영의 차원에서도 성공적이었고 성장되고 있는 한국의 개신교 세력에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개신교의 세력은 지금도 미국문화와의 연계성을 일정부분 가지고 있음은 물론 한국의 여러 분야에서 조직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공동체사회문화의 시간과 공간의 한 부분에서 나름대로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의 교육제도에서부터 정치, 경제, 외교, 군사 그리고 문화적인 상황 등은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한많은 '구걸외교'는 벗어나야 할 때가 왔다. 현재 한국인의 생동력 넘치는 모습은 미래의 밝은 사회와 국가를 보는 듯하다. 국민의 의식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정치인과 국가적 차원의 행보가 국민이 지향하는 탈식민주의문화의 수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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