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임진왜란(壬辰倭亂)의 성격은 세계적인 전쟁사이자 동북아시아지역의 패권싸움이며 조선(朝鮮)의 명운(命運)이 걸린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재상(宰相) 유성룡은 관직을 스스로 사직(辭職)하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임란(壬亂)의 처참한 상황과 전쟁내용을 기록했고 전쟁을 막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징계(懲戒)하며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작성했다. 징비록은 후대들에게 삼가 교훈이 되도록 널리 학습(學習)됐어야 마땅하지만 사고(史庫)에 묻혀 있다가 관리소홀로 일본통신사의 손에 들어가 일본어로 먼저 출간되었다. 그 책은 일본에서 요즈음 말대로 베스트-셀러(best-seller)가 되었고 중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1597(정유丁酉)년에 일본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수십만 명의 조선인의 코를 베어서 소금에 버물어 상자 안에 넣어 그에게 바친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코가 잘려진 자들의 혼령을 달래주기 위해 일본에 코 무덤(鼻塚)이 조성되었으나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하여 일본은 코 무덤 대신 귀 무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그들을 위한 위령비(慰靈碑)가 없다. 그에 대한 역사교육은 과연 어떠한가? 우리는 그렇게 반문(反問)하지 아니할 수 없다.
④1637년 청나라에 패전한 조선은 청태종(淸太宗)의 강요에 의해 삼전도의 비석(원명, 대청황제공덕비도)을 만들어 남한산성지역 오늘날 서울 송파구에 세워졌다. 그 비석에는 감추고 싶은 치욕적인 역사기록이 새겨져 있지만 과연 뼈를 깎는 각고(刻苦)의 반성과 노력 그리고 조선의 국가적 대책은 준비되어 있었던가?
1801년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 1866년 병인양요, 1868년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분묘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堀事件)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1871년 대원군은 당대(當代)와 후대(後代)에게 전하는 척화비(斥和碑)를 전국적으로 건립했다. 그는 현재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를 어떠한 관점에서 어떻게 알고 있으며, 정치인과 지식인은 또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그러한 중차대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역사교육은 공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지?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왜 유독(唯獨)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는지?
⑤근대화시기에 발생한 친일파, 소수 신앙단체의 매국행위 및 친일행위, 해방이후 이념갈등, 정치적 부당행위, 민주화운동, 국민통합을 위한 평화운동 등은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역사의식과 판단 및 분석 자료를 통해 공교육은 병행되어야 한다. 국민총화를 이끄는 정신적 지주, 구심점이 발굴되도록 국가적 치원에서의 공교육은 진행되고 있는지?
오늘의 대한민국은 패전(敗戰)의 교훈의 담긴 비석이나 그와 유사한 역사적 불편한 진실을 얼마나 공개적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널리 알려야 한다. 올바른 역사교육은 국민을 현명하게 육성하는 것이며 보다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2019. 08.11. 말복을 맞이하여 학담(學潭), 삼가 소고(小考)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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