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상 그리고 내일

통한(痛恨)이 담긴 비운(悲運)의 역사(歷史)를 알아야 미래가 있다.①~②

학담(學潭) 2019. 8. 12. 14:27

 

통한(痛恨)이 담긴 비운(悲運)의 역사(歷史)를 알아야 미래가 있다.

 

①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국의 쓰라린 역사, 비운이 담긴 통한의 역사를 감추고 싶어 한다. 그 반면에 각 나라마다 개선문, 승전비(勝戰碑), 국가적 위인들의 동상은 많으나 패전비(敗戰碑)와 그와 유사한 사건이 담긴 추모비(追慕碑)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은 역사적 패전의 고통과 국가적 수치스러움을 알리기 위해 후대들에게 비통한 사건이 벌어진 지역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면서 결코 잊지 않도록 교육시킨다. 예컨대 과거의 유대국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유대인은 독립(獨立)을 쟁취(爭取)하고자 투쟁했다. 유대인의 대(對)로마 항쟁(抗爭)은 처절했고 최후로 결전지(決戰地)로 알려진 맛사다(Masada)지역에 유대인이 결집하여 결사적으로 항전(抗戰)했으나 74년 로마군에 의해 참패(慘敗)했다. 그로 인해 유대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흩어진 유대인의 방랑생활은 세계적으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유대국은 1948년 5월 14일 과거 유대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명으로 부활했다. 이스라엘인이게 성역(聖域)이자 역사적 비운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통곡의 벽, 맛사다 지역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의 아우쉬비츠(Auschwitz)수용소(현재 폴란드지역)도 국가적 지원과 외교적 협력을 통해 잘 관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왜 자국의 치욕의 역사를 가감(加減)없이 후대에게 전하고 있을까?

우리 선조(先祖)들께서 남기신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상고사(上古史), 고조선사(古朝鮮史) 또는 단군(檀君)시대의 역사라고 지칭(指稱)한다. 대한민국은 고조선사, 삼국시대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승계하고 있으나 조선상고사의 유적, 유물 등의 발굴은 현재 지정학적인 한계로 인해 어려움에 봉착(逢着)되어 있다. 

불운의 역사적 시기를 맞이한 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660년)와 고구려(기원전 37년~기원후 668)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당나라에 의해 고조선시대의 선사(先史)문화, 상고사(上古史)와 그리고 사적(史蹟) 등이 깡그리 소실되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못지않은 당나라의 악행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적어도 한번 정도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통일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가 송두리째 당나라에게 넘어갔다. 참으로 통한의 역사였다. 하지만 오늘의 역사적 공교육은 어떻게 분석되고 그 의의를 발굴하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②징기스칸의 유럽정벌은 세계사에 기록되었고 서구의학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은 몽골 병이라고 치부한 것으로 보아도 유럽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세계최고의 군사력과 용병술 지혜로운 전략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후예들이 승계한 원(元)나라가 수차례 고려(高麗)침공했으나 고려의 군관민이 협력한 항몽(抗蒙)운동으로 막아 냈다. 차후 도탄에 빠진 백성과 국력상실 등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화친(和親)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장군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의 대몽항쟁(三別抄 對蒙抗爭, 1270~1273)이 진도에서 일어났다. 그가 1271년에 전사(戰死)하자 그 뒤를 이어 김통정 장군이 항쟁의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그곳에서 강력하게 결사항전을 지속했지만 여러 가지의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없어 무너졌다. 역사적 비운이 새겨진 삼별초 항거순의비(三別抄抗擧殉義碑)가 제주도에 존재하고 있으나 그에 대해 국민은 무엇을 발견하고 깨달았으며 국가적 역사교육은 어떠한 점을 제시하고 있을까?

잃어버린 고대 선조들의 땅, 대한민국의 영토(북한지역 포함)가 조선의 세종임금 때 그나마 그 정도의 윤곽으로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