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痛恨)이 담긴 비운(悲運)의 역사(歷史)를 알아야 미래가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국의 쓰라린 역사, 비운이 담긴 통한의 역사를 감추고 싶어 한다. 그 반면에 각 나라마다 개선문, 승전비(勝戰碑), 국가적 위인들의 동상은 많으나 패전비(敗戰碑)와 그와 유사한 사건이 담긴 추모비(追慕碑)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은 역사적 패전의 고통과 국가적 수치스러움을 알리기 위해 후대들에게 비통한 사건이 벌어진 지역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면서 결코 잊지 않도록 교육시킨다. 예컨대 과거의 유대국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유대인은 독립(獨立)을 쟁취(爭取)하고자 투쟁했다.
유대인의 대(對)로마 항쟁(抗爭)은 처절했고 최후로 결전지(決戰地)로 알려진 맛사다(Masada)지역에 유대인이 결집하여 결사적으로 항전(抗戰)했으나 74년 로마군에 의해 참패(慘敗)했다. 그로 인해 유대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흩어진 유대인의 방랑생활은 세계적으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유대국은 1948년 5월 14일 과거 유대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명으로 부활했다. 이스라엘인이게 성역(聖域)이자 역사적 비운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통곡의 벽, 맛사다 지역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의 아우쉬비츠(Auschwitz)수용소(현재 폴란드지역)도 국가적 지원과 외교적 협력을 통해 잘 관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왜 자국의 치욕의 역사를 가감(加減)없이 후대에게 전하고 있을까?
우리 선조(先祖)들께서 남기신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상고사(上古史), 고조선사(古朝鮮史) 또는 단군(檀君)시대의 역사라고 지칭(指稱)한다. 대한민국은 고조선사, 삼국시대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승계하고 있으나 조선상고사의 유적, 유물 등의 발굴은 현재 지정학적인 한계로 인해 어려움에 봉착(逢着)되어 있다.
불운의 역사적 시기를 맞이한 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660년)와 고구려(기원전 37년~기원후 668)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당나라에 의해 고조선시대의 선사(先史)문화, 상고사(上古史)와 그리고 사적(史蹟) 등이 깡그리 소실되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못지않은 당나라의 악행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적어도 한번 정도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통일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가 송두리째 당나라에게 넘어갔다. 참으로 통한의 역사였다. 하지만 오늘의 역사적 공교육은 어떻게 분석되고 그 의의를 발굴하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징기스칸의 유럽정벌은 세계사에 기록되었다. 한동안 서구의학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환자의 그 어떤 질환이 ‘몽골 병’이라고 치부한 것으로 보아도 유럽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징기스칸은 당시 세계최고의 군사력과 용병술 지혜로운 전략전술을 가지고 유럽의 일부 지역들을 공략했다. 그의 후예들이 승계한 원(元)나라가 수차례 고려(高麗)침공했으나 고려의 군관민이 협력한 항몽(抗蒙)운동으로 막아 냈다. 차후 도탄에 빠진 백성과 국력상실 등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화친(和親)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장군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의 대몽항쟁(三別抄 對蒙抗爭, 1270~1273)이 진도에서 일어났다. 그가 1271년에 전사(戰死)하자 그 뒤를 이어 김통정 장군이 항쟁의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그곳에서 강력하게 결사항전을 지속했지만 여러 가지의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없어 무너졌다. 역사적 비운이 새겨진 삼별초 항거순의비(三別抄抗擧殉義碑)가 제주도에 존재하고 있으나 그에 대해 국민은 무엇을 발견하고 깨달았으며 국가적 역사교육은 어떠한 점을 제시하고 있을까?
잃어버린 고대 선조들의 땅, 대한민국의 영토(북한지역 포함)가 조선의 세종임금 때 그나마 그 정도의 윤곽으로 남겨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성격은 세계적인 전쟁사이자 동북아시아지역의 패권싸움이며 조선(朝鮮)의 명운(命運)이 걸린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재상(宰相) 유성룡은 관직을 스스로 사직(辭職)하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임란(壬亂)의 처참한 상황과 전쟁내용을 기록했고 전쟁을 막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징계(懲戒)하며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작성했다.
징비록은 후대들에게 삼가 교훈이 되도록 널리 학습(學習)됐어야 마땅하지만 사고(史庫)에 묻혀 있다가 관리소홀로 일본통신사의 손에 들어가 일본어로 먼저 출간되었다. 그 책은 일본에서 요즈음 말대로 베스트-셀러(best-seller)가 되었고 중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1597(정유丁酉)년에 일본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수십만 명의 조선인의 코를 베어서 소금에 버물어 상자 안에 넣어 그에게 바친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코가 잘려진 자들의 혼령을 달래주기 위해 일본에 코 무덤(鼻塚)이 조성되었으나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하여 일본은 코 무덤 대신 귀 무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그들을 위한 위령비(慰靈碑)가 없다. 그에 대한 역사교육은 과연 어떠한가? 우리는 그렇게 반문(反問)하지 아니할 수 없다.
1637년 청나라에 패전한 조선은 청태종(淸太宗)의 강요에 의해 삼전도의 비석(원명, 대청황제공덕비도)을 만들어 남한산성지역 오늘날 서울 송파구에 세워졌다. 그 비석에는 감추고 싶은 치욕적인 역사기록이 새겨져 있지만 과연 뼈를 깎는 각고(刻苦)의 반성과 노력 그리고 조선의 국가적 대책은 준비되어 있었던가?
1801년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 1866년 병인양요, 1868년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분묘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堀事件)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1871년 대원군은 당대(當代)와 후대(後代)에게 전하는 척화비(斥和碑)를 전국적으로 건립했다. 그는 현재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를 어떠한 관점에서 어떻게 알고 있으며, 정치인과 지식인은 또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그러한 중차대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역사교육은 공교육과정에 포함시켜 제대로 논구되고 있는지?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왜 유독(唯獨)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는지?
근대화시기에 발생한 친일파, 소수 신앙단체의 매국행위 및 친일행위, 해방이후 이념갈등, 정치적 부당행위, 민주화운동, 국민통합을 위한 평화운동 등은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역사의식과 판단 및 분석 자료를 통해 공교육은 병행되어야 한다. 국민총화를 이끄는 정신적 지주, 구심점이 발굴되도록 국가적 치원에서의 공교육은 진행되고 있는지?
오늘의 대한민국은 패전(敗戰)의 교훈의 담긴 비석이나 그와 유사한 역사적 불편한 진실을 얼마나 공개적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널리 알려야 한다. 올바른 역사교육은 국민을 현명하게 육성하는 것이며 보다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2019. 08.11. 말복을 맞이하여 학담(學潭), 삼가 소고(小考)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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