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그리스도교)인에게 올리는 글

9. 예수의 박애(博愛)사상 – 언어정화부터 1) 유ㆍ무형의 형제살인에 대한 비평

학담(學潭) 2019. 11. 30. 15:43

9. 예수의 박애(博愛)사상 언어정화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나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말한다. 예수는 형제에게 욕 하는 말로 형제를 살인할 수도 있으니 말을 삼가 조심하라고 한다. 언어폭력(분노하게 만드는 것, 바보, 멍청이라는 용어 등)은 형제를 살인한 것과 같다고 했다.

 

1) 무형의 형제살인에 대한 비평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카(Racha)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 2122)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위에서 언급된 형제라는 의의를 어떻게 주시했나? 부적절한 언어사용과 언어폭력에 대해 어떠한 안목을 가지고 비평했는가? 이에 대해 이반트(H. J. Iwand)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종교)교육학자였던 디그나트(W. Dignath)의 사상이 주목되고 있다.

디그나트는 우리가 형제를 분노하게 만들어 살인하게끔 유도했다면, 그 행위는 문제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대안과 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하지 못하면 과거 가톨릭의 대주교적인 판단들을 수정할 수 없었다는 변명과 다를 바 없다. 그 판단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도록 이끌었고 그런 위험상황은 더 이상 간과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분노가 유발되어 내면에 깊게 적채(積債)되면 증오(憎惡)와 원한(怨恨)이 형성되어 살기(殺氣)를 발()하고 살인(殺人)할 수 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Racha)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

 

일상생활 속에 또는 증오 속에 라카’(Racha)미련한 놈’(Nichtsnutze), ‘바보’(Narr)라는 언어를 사용하면 살인행위를 유발하게끔 하는 위험한 요소가 다른 용어 사용보다 세배나 더 높다고 이반트(H. J. Iwand)는 분석했다. 그는 1950년대부터 활약한 독일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이며 (종교)교육자였다. 그의 첫 번째 설명은 증오’(Hass)이다. 그는 중오에 대해 문제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누가 형제를 분노하게 만들었다면, 그는 법적으로 잘못이며 형제를 살인한 자와 같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현시대의 사회라는 마스크 속에 얼굴이 가리어졌다. 우리는 실제로 사회라는 마스크에 가려진 살인자의 패거리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참회의 자아성찰과정에서 가려진 살인자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즉 사회는 그들을 잔인한 것이 아니고, 불합리한 것도 아니며, 미미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한 것을 일반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하지 않는가!

증오는 증오를 증폭시키고, 증오는 그렇게 원한에 의해 다시 발생되며, 또 다른 원한은 하나의 같은 세계에서 어울러져 살기를 원치 않는다. 증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오는 죄악을 다른 사람에게 발견하게 되면 스스로 자신의 허물은 감추고, 잘못을 다른 측에 전가시킨다. 그렇게 하는 것은 생명존중과 배치되며 인권을 짓밟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의 주인들(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증오를 가르치고, 그들은 그렇게 서로 증오하며 우리는 그들을 통해 증오하는 것을 교육받았다. 피교육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주인은 확실하다고 믿는다.

증오는 상대방에 대한 하나의 세계를 아주 협소하게 만든다. 그와 같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그들이 서로 만났다면, 그들은 상호간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증오가 관용하는 믿음의 나를 만나 승화되면, 그 관용함은 다시 나를 살리게 한다. 증오의 장벽을 뛰어 넘어야 증오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러한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

이반트의 두 번째는 라카’(Racha)에 대한 해석은 이러하다. 라카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히브리인의 욕설이며, 헛된, 공허한, 판단력이 없어 머리가 텅 빈 것과 같은 멍청이라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한 용어는 바로 분노하게 만들고, 살인동기를 간접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며 또 인간에게 심리적 장벽을 쌓게 만든다.

우리는 판단능력의 부족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미숙함의 사이에 있는 그런 장벽을 먼저 허물어야 편견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상호간의 장벽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 벽이 오해의 원천, 경멸의 원천, 잔혹함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또한 꼭 그러하지 않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개념 라카에 대하여 예외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만약 예수가 스스로 이 땅의 고등법정에 자신이 증인으로 채택되어 나서는 것을 보기 원했다면, 그는 그의 형제들이 행동하는 판단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적절한 언어사용의 문제점들을 이해하고 그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올바른 (종교)교육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반트는 지배계급은 교육받지 못한 피지배자들을 비하(卑下)하는 의미에서 오디 프로판움 불구스(Odi profanum vulgus; 천민, 하층민)라고 표현했다. 지배계급은 교육이 사회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요소라고 주지하고 있었다. 여하튼 그들은 하층민을 바보로 취급하고 다수의 민심을 경시하며, 그들에게는 교육받을 권리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계층과 성직자들은 사안에 따라 그들에게 이웃사랑을 말했다. 그들 모두가 이웃사랑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이웃을 바보 멍청이로 분류해 이웃에게 증오의 폭을 넓히게 만든다. 지배계층에게 이웃은 그저 군서(群棲)동물처럼 살고 있는 어리석은 군중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이웃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나, 그 본질은 아주 값싼 (존재의) 믿음이라기보다는 소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의 역사가 식민지 나라들의 역사의 입장이 되어 말할 수 있다면, 갖지 못한 자와 모욕 받은 자들이 입을 열었다면, 그들이 Silence aux pauvres (=Stille an den Armen; 가난한 자들을 향한 침묵)를 깨트린다면, 왜 우리들은 타국의 교육 자료와 문화재들을 그 어떤 은밀한 장소에 비치해 두었는가? 왜 교회는 그것을 숨기고, 그런 나쁜 행동을 묵인하고, 형제를 살인한 자들을, 그들의 규정을 성스럽게 축복했는가?”라고 그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바이블은 교육받은 사람들과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된 균열을 봉합한다고 그리스도교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적인 교육은 그 어떤 좋고, 나쁘고, 공동적인 문제 등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구인들의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이 오직 교육받은 자들만을 위한 그리스도교라는 신앙단체를 만들었다면,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 또 다른 백성들을 구분했었다면, 그러한 것은 바보 멍청이의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양심의 재판은 진행 중에 있다고 이반트는 설명했다.

세 번째는 바보(Narr, Dumkopf)에 대한 그의 해석은 이어진다. 어떤 자가 형제에게 말했다. 이 바보야! 너는 지옥 불을 면치 못하리라. 이와 같은 말은 서구에서 극히 조심해야 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서구에서 바보라고 하는 것은 곧 신앙이 없는 자(Gottloser)! 하나님()의 품을 떠나 구제불능인자 라는 강한 부정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바보가 아닌 자는 하늘과 지옥 사이에 복음적이지 않은 인간들을 신의 은혜로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 지옥 불에 빚지는 자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지옥 불 곁에 있지 아니하고 의로움을 위해 성스러운 생명의 불을 밝힌 자는 예수의 은혜와 평화가 무슨 뜻인지를 알고 실행한 자다. 그의 복음실천과 희망의 메시지는 고통 받는 자, 빈곤한 자의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증오하며 라카(어리석은, 멍청이), 미련 한 놈, 바보라는 말로 업신여기며 멸시하는 것도 내면적 살인행위로 규정한 예수의 메시지는 외형적 살인 못지않게 심각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그것은 그 어느 누구도 살인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언어폭력으로 형제살인의 씨앗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가 공동체사회에서 실천될 수 있도록 적절하고 합당한 언어사용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과 언어정화의 당위성이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