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그리스도교)인에게 올리는 글

9. 예수의 박애(博愛)사상 – 언어정화부터 3) 원수사랑

학담(學潭) 2019. 11. 30. 15:47

3) 원수사랑

 

예수는 당시 전래된 통속적 사랑함과 미워함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였다. 그는 증오와 원한의 대상으로 여겼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고 사랑의 가르침을 통해 세기사적 전환점을 제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랑의 의의를 설명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 4347)

예수의 사랑에는 의식개혁이자 사회개혁 사상이 함께 들어 있다.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힌 고질적 관념을 극복하고 차원 높은 사상으로 전환시켜 주고 있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다시 이해하고 돌이켜보며 생각하게 하는, 마음의 폭을 넓혀주는 한없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이미 2000여 년 전에 예수가 펼치려고 한 그러한 사상과 실천은 획기적이고 개혁적인 발상이자 파천황적인 특징을 가졌다고 거듭 말할 수 있다. 예수는 특히 제자들에게 함께 살고 있는 이웃사람에게 온유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게 하고, 점차적으로 보편적 인류애를 가질 수 있게 노력했다. 따라서 예수가 새로운 행동권으로 제시한 것이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의 완성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화평(和平)함이 이루어지기를 촉구했다. 예수의 화평사상은 최종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복음으로 귀결되었고 예수 자신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다 이루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는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자요, 미움과 원한 그리고 증오가 폭발하여 복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원수는 나의 적이며 언젠가는 나를 공격하는 대상이 됨으로써 나를 불안하게 하니 제거되어야 할 자라고 여긴다. 그러한 원수를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음을 예수는 누누이 가르쳤다. 예수의 보편적 사랑과 사상에 대해 잘 요약된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들어 있다. 그 내용은 사도 바울이 예수의 사랑의 정신을 깨달아 작성된 사랑의 복음서로 알려졌다. 그 복음서는 당시 그리스의 항구도시로 유명했던 고린도지역의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書簡文)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떠한 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 4-13)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 31-32)

 

깨달음이 영성적으로 장성한 사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실천하기 힘든 것이 그리스도적인 사랑이며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본질은 온유한 사람이 되어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서로간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은 자신의 원수를 사랑해야만 할 이유나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일방적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면 납득이 안 되어 오히려 불만스럽고 짜증날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사전에 이런 저런 예를 들어가며 가르쳤고,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고 살인은 살인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하늘나라와는 멀어지고 반복되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역설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서 벗어나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용서와 사랑을 가르쳤고 율법의 완성인 이웃사랑과 십자가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랑하는 법(원리)을 보여주었다. 그 법과 원리가 그리스도인이 마음의 중심을 바로 잡고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할 도덕적 양심의 준수이자 실천계명이다. 이에 예수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해변 가에 서 있는 무리들에게 설교했고, 제자들에게 그 비유가 천국의 비밀”(13: 11)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3:3-9)

 

씨 뿌리는 비유는 제자들에게 암시한 수행공부의 계제였을 것이다. 즉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각자 수행의 경지와 실행의 결과물이 어떠한 가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비유는 심경(心耕)과 심전(心田)의 공부와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심경(心耕)은 마음의 밭을 경작(耕作)한다는 것이며, 심전(心田)이란 마음의 밭, 즉 마음의 중심자리를 의미한다. 심경은 올바른 마음바탕자리의 준비와 마음바탕자리에 불순물이 생성되지 않도록 매일 매일 구석구석 관리해야 한다. 청소하듯이 일상생활 속에서 부정(不淨)한 마음을 청소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추스르며 성찰을 통해 마음에 잡초가 나지 않도록 마음을 가꾸는 것이다. 마음의 밭인 심전에서 밭을 갈 듯이 심경을 잘 가꾸고 일구어내면서 생명의 문을 찾아가면 마음의 중심자리(심중 心中)를 발견할 수 있다. 또 그 심중이 흔들림이 없어야 화평케 하는 하나님 아들과 같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심전(心田)을 잘 다스리고 심경(心耕)을 어떻게 일구어 내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예수는 산상수훈()복음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 그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스펙트럼과 실천의 길은 앞으로 더욱 논구(論究)되어 현실에 올바르게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21세기 인류보편사적 안목을 확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심신의 촉매이자 영성적 횃불이 될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지향(志向)하고 장성한 사람으로써 실천 덕목으로 추구(追求)해야 할 길이 씨 뿌리는 비유로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