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그리스도교)인에게 올리는 글

9. 예수의 박애(博愛)사상 – 언어정화부터 4) 이웃사랑ㆍ생명존중사상

학담(學潭) 2019. 11. 30. 15:50

4) 이웃사랑생명존중사상

 

예나 지금이나 영생(永生)은 인간의 믿음과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죽으면 각자 믿음의 성스러운 곳에서 영생하기를 기대한다. 사후세계에서 영혼의 영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복음으로 전하고 있는 영생은 놀랍게도 아주 가까운 곳, 이곳에 놓여있었다. 죽어서 천당 간다는 것보다 지금의 현실에서 행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 가를 예수는 직시하며 가르친다. 그에 대한 예수와 한 율법자간의 문답이 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라.”(10:25-28)

 

먼저 내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예수의 답은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10: 3036) 강도당한 사람을 비유로 들었다. 강도를 만나 약탈당하고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거의 빈사상태로 거리에 방치되었다.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본 세 사람의 행동이 이채롭게 설명되고 있다.

한 제사장이 빈사상태에 있는 자를 보고도 피해 지나갔고, 한 레위인도 그 제사장처럼 그렇게 지나쳤다. 그러나 여행 중에 있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길거리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하고 가엽게 생각하여 그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한 후 주막으로 후송시켜 돌봐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 다음날 주막주인에게 치료비(은전 두 냥; 데나리온 둘)를 건네주면서 환자를 돌봐주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그는 치료비가 부족하면 다시 되돌아 올 때 갚겠다고 약속까지 하면서 한 생명을 살리고자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실천했다. 이와 같은 비유를 든 예수는 율법자에게 누가 강도(强盜)당한 이웃이 되었느냐고 질문하니 그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하였다. 그 말을 들은 예수는 영생을 구하기 전에, 이 땅의 현실 속에 사마리아인처럼 가서 너도 그렇게 행하라”(누가 10: 2537)라고 가르친다. 실천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제시되었다. 그러한 삶의 결실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길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공동사회에서 이웃이라는 개념과 이라는 상반적이자 이분법적인 생각의 뿌리를 뽑아내고 있다. 이웃사랑의 실천,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본질적이고 현실적이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선행은 인류사의 보편적 당위성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인간의 도덕성인도주의를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예수의 평화사상과 원수사랑 계명이 힘없이 나약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 세상에는 이웃을 거의 적으로 잘못 생각하거나 잘못 해석하여 적이라고 분명하게 표현되는 존재가 함께 공존( 11: 15, 비교: 11: 20~24, 23: 1~35)한다. 그런 복합적이고 우매한 적 관계 사이에 비양심적인 행위가 인간들 사이에 지배적으로 발생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악이며 악을 행하는 것이다. 구약의 아모스에서 악을 어떻게 처리하라고 했는가? 보편적 가치이자 삶의 진리가 어디에 있는 가를 예수의 이웃사랑 실천과 연계시켜 궁구(窮究)해보자.

너희는 살기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 찌어다.”(5:1415)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자는 사람사랑 즉,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선()을 추구해야 한다. 그와 같은 선을 추구하면서 실행하는 길은 먼저 악을 미워하고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으로 여겨진 마음에 형성된 증오(憎惡)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다시 악()을 저지를 수가 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해야 증오에서 발생된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예수는 악의 고리를 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이웃사랑이라는 인류문명사의 보편적 실천을 새로운 복음으로 전하며 인류애를 강조했다. 그는 기존의 틀에 박힌 종교적, 제도적 행동양식보다 보편적 인류 종교심성으로 행하는 선행이 더 앞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류 보편적 차원의 선행(善行)이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아끼고 배려하여 살리는 고귀한 행위다. 예수는 사마리아인처럼 생사의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는 자를 조건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까지도 환자를 위해 제공하면서 구해주는 것, 그러한 실천의 길이 바로 영생을 구하는 길이며 영생의 길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예수의 생명윤리사상은 사회윤리 및 도덕성의 혁신이며 공동사회의 가치창출이자 환원이며, 세계 인류의 보편적 질서를 추구하는 도덕성이고 나아가 종교를 초월한 초종교적 영성사상으로 집약된다. 그러한 예수사상은 이미 2000여 년 전에 실천되었고 인류평화를 위한 종교(宗敎)인과 비종교인, religion과 종교(宗敎), 종파간의 의식개혁과 제도적 종교사회의 개혁을 담아내고 있다.

오늘날 인류는 지구촌이라는 한 둥지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가족이라는 점이 중요시되고 있다.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강조한 이웃사랑, 사람의 생명사랑, 원수사랑 계명을 실천했다면 적과 동지(친구)라는 극명한 이분법적인 도그마(Dogma)와 지배적 사상이 농후한 크레도(Credo)의 관계는 성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을 긍휼(矜恤)히 여기고 사람을 사랑했던 예수의 삶, 그의 생철학(生哲學)은 당시의 종교사회에 처한 반인륜적인 도피성과 공격성, 적에 대한 증오와 원한 등을 해체시켜 주고자 했다. 그 노력은 상생의 정신이며 사랑 나눔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12: 89)고 한 것은 예수의 이웃사랑실천이 인류의 보편적 선()인 생명을 살리는 적극적인 삶, 능동적인 생활대도였다는 것을 또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예수가 자신을 모함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걱정하며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렸다(19). 생명존중사상과 실천은 사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짐승들에게까지 언급되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짐을 부리울찌니라.”(23: 45)

 

사랑은 생명존중사상에서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되면 서로의 마음(생명)의 문을 함께 열리게 한다. 하나 되기 위해 성찰하며 기도하는 것과 선()의 행실(行實)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