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단상속에

제 정신(精神) 차렸는가? 역사의 거울 앞에 회고하며 반성할 줄 알아야 지혜의 문은 열린다.

학담(學潭) 2019. 7. 19. 12:30

제정신(精神) 차렸는가? 역사의 거울 앞에 회고하며 반성할 줄 알아야 지혜의 문은 열린다.

 

민족의 역사는 그 나라 문화의 숨결이자 생명력 넘치는 기운과 같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고 문화를 잉태시키지만 그러한 역사와 문화는 세계사의 거울이 되어 다시 사람다운 사람, 국가다운 국가의 면모와 품격을 유지시켜 주어 인류문화사를 발전시킨다. 

 

동북아시아 및 동아시아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고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패망(敗亡)하면서 그들의 고대사 및 고대조선사문화의 다양한 흔적도 한 순간에 사라졌다. 나당연합군은 7년 동안(670~676)지속되었다. 외세에 의해 삼국(三國)을 통일했다는 신라의 영역이 어떠한가를 지도(地圖)를 펴놓고 살펴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어 실소(失笑)와 탄식을 금할 수 없을 정도다. 백제와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가 당나라에게 빼앗긴 통한(痛恨)의 참사가 바로 통일 신라의 시작이자 역사라고 생각된다. 패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과 그들의 문화사고(文化史庫), 문화재 등은 어떻게 되었고 또 어디로 갔을까? 

 

1388년(고려 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일으킨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은 차후 명(明)과 청(淸)나라의 속국(屬國)으로 전락하는 단초가 되었다. 1392년 이성계는 어쩌면 행운을 잡은 조선의 창업주가 되어 조선의 태조(太祖)가 되었으나 왕의 정복(正服)인 황금색의 곤룡포(袞龍袍)를 착용하지 못한 불운의 왕으로 남았다. 그 후 만 200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고 1598년까지 대략 7년 간 지속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과의 무역거래를 통해 조총을 수입했고 일본군은 신무기로 무장했다. 일본군의 장수 고니시(小西行長)의 종군신부로 임진란(壬辰亂)때 참여한 신부가 포르투갈 예수회 가톨릭 소속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였다. 그는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다. 그 당시 이탈리아 예수회소속 가톨릭신부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지금도 발견되는, 일본 교토시(市) 히가시야마(東山) 구(區)에 존재하고 있는 귀 무덤(코 무덤)은 비탄과 통탄(痛嘆)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임진왜란 당시에 발생된 과거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역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000명분의 코가 묻혀 있으나 일본과 한국정부 모두 관리차원에서 재정을 지원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 시대의 10년 전후로 태어난 조선의 백성은 참으로 불행하기만 하여 원통하고 분했을 것이다. 그들은 청소년시절에 임진왜란을 당했다. 아사(餓死)한 사람, 굶주린 백성이 인육을 먹었다고 하는 것과 역병으로 병들어 죽은 수많은 백성들, 부모 형제와 참혹하게 살해된 가족 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지기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과 조선사가 임진왜란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으나 국가와 조정은 진솔하게 역사를 바라보고 참회와 지혜의 문을 찾고자 갈구했는지? 

하지만 그 후에도 조선의 정치인은 정신 차리지 못했다. 1627년 인조(仁祖)왕 시대에 청국(淸國)이 일으킨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맞이한 40~50대의 조선인은 임진왜란에 이어 인간이하의 수모를 당했다.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은 물론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후금(청나라)군이 철수하면서 수많은 백성을 도살하고 수만 명을 노예로 삼아 팔았다.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된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서 포르트갈의 상인에 의해 노예로 매매된 것과 동일하게 치욕스러운 모습을 또 당했다. 

그 후에 발생한 조선의 다양한 사화(史禍)는 국력을 부정적으로 분산시켰다. 특히 외세에 의해 조선의 나라에서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는 국력을 쇠약(衰弱)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국제적 사건을 지켜본 일본은 조선을 테스트해 보았다. 1875년 조선 땅에서 방화, 살육, 약탈 등을 자행한 일본의 운요호(雲揚號事件)사건은 조선 침탈사건의 시작이었고 조선은 속절없이 당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조선침공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조선의 국력을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고 조선의 멸망을 부추겼다. 

 

20세기 서양문화이식의 총칼은 한국을 향했고 일본의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행위는 조선의 심장부를 정조준(正照準) 했다.  조선의 조정은 1894년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를 간파한 일본은 독단적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였고 동학운동을 진압한다는 차원에서 조선의 백성을 헤아릴 수 없이 죽였다. 농민들의 시체가 산과 같고 그들의 핏물이 오래 동안 개천에 흘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도륙(屠戮)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동학혁명진압 대가(代價)로 엄청난 배상금액을 조선에 청구했다. 지불능력이 없는 조선은 만주진출을 꾀하는 일본에게 조선의 영토를 전쟁의 교두보로 내주었다. 결국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났고 승자인 일본은 청국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요동반도(遼東半島)의 영유를 확정했다. 불붙은 일제의 북진정책과 야욕은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충돌되어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1905)으로 발전되었고 승전국은 일제가 되었다. 

 

일제의 대륙진출은 1905년 미국과 비밀리에 맺은 ‘카스카-태프라 밀약’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도외시하고 1909년 9월 청국과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었다. 본래 우리의 영토였던 간도지역이 청국으로 넘어갔다.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멸망시켰고 식민지로 만들어 1945년까지 통치했다. 강대국들이 그 당시 약소국으로 전락한 대한제국의 영토를 그들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다. 수치스러운 역사적 단면이었으나 반면교사가 되어야 한다. 

 

해방과 더불어 미국과 구소련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인해 남북이 강제적으로 분단되었고 군정(軍政)이 들어섰다. 서로간의 정치적 노선과 이념 등의 갈등은 극도의 사회적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우리 한민족, 대한민국의 한 많은 수난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시작되었다. 

 

1950년 1월 15일 발표된 미국의 에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은 구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던 북한에게 남한침략의 기회를 제공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 선언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사실상 제외된 것이었다. 결국 그해 6ㆍ25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은 세계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한 전쟁사로 기록되었고 약 700만 명의 한국인이 살상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勃發)한 핵심요인은 바로 미국이 만들어 낸 ‘에치슨 선언’이라고 분석된다. 

 

이와 같은 전쟁사, 국치사건 그리고 한민족의 수난사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각각의 정치적 이념과 진영논리(=당파싸움)에 정신이 팔려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워 졌고 자아 및 국가의 정체성 상실 등이다. 역사의 거울 앞에 참회와 반성 그리고 지혜의 문을 촉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지향적인 대안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특히 역사적 공교육의 부재는 이와 같이 나열된 문제와 사건들을 암적 존재로 키우는 것과 다를 봐 없다. 국어ㆍ영어ㆍ수학 못지않게 자국의 올바른 역사교육이 참으로 중요하다. 

 

왜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노예사상’에서 벗어나 ‘철인정치’를 설명했고, 왜 독일의 신학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루돌프 불트만이 바이블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와 ‘양식비평’(form criticism)을 논했을까? 한국은 모화사상(慕華思想), 일제(日帝)사상, 미국문화와 사상에서 언제 벗어 날 수 있을까? 중국과 일본이 만들어 내놓은 역사와 미국의 논객들이 작성한 문화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지 않은지? 왜 남의 조상을 위하고 있는지? 비록 구국의 이념과 사상으로 형성된 사상단체 또는 신앙단체의 지도자이었을지라도 그들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신격화작업도 시대에 역행하는 문제 중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사건들 모두 다 평상심을 가지고 검토한 다음에 바르게 바라보아야 진상을 알 수 있고 우리의 진면모가 발견될 수 있다. 오늘날 국내 국외의 정치사회문화의 패러다임을 올바로 직시해야 한다. 경제 강대국으로 손꼽히는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이 다시 대한민국을 우습게보고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는 형국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알려지고 있는 미국과 일본 간의 군사협약, 중국 시진핑의 군사 및 경제 강국의 면모과시, 한국의 사드설치에 반대한 중국의 정치적 시비와 보복성, 지금 일본의 민낯을 내보이고 있는 노골적인 경제보복은 심상치 않다. 중국뿐만 아니라 제 2의 ‘카스카-태프라 밀약’과 유사한 행동을 취하는 미국과 일본의 태도는 한국을 속국으로 여기고 함부로 대한다는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국제사회의 냉정함 속에 이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태도가 지금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위기의 문화상황화에 처해 있다. 만약 그에 대한 국내, 국외 한국단체들이 합심하여 공표된 것, 초교파적이고 초종교적인 언급과 대응 대책 등이 없다면, 그들의 기능은 상실된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2020년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한국이 타국에 좌우되지 않도록 한국인의 단결력과 국력이 집중되어야 한다. 한 많은 ‘구걸외교’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한 총력전은 국민과 함께 필히 일구어내어야 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당연한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섭리다. 우여곡절 속에 혈맹(血盟)으로 생각했다고 하는 미국이 국익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수용해야 하며 그에 대한 대응책도 강구되고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과 국민들은 어떠한가? 제정신(精神) 차렸는가? 역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역사적 거울에 앞에 선 대한민국, 당면한 국가적 경제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너, 나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 국민들의 자발적인 마음으로 일어난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에 대한 사회적 현상을 정부가 정치적으로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국가는 보다 지혜롭고 슬기롭게 조금 더 멀리 그리고 넓게 내다보고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냉철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국민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오늘과 미래의 역사적 평가를 공정하게 받을 수 있어 또한 겸허하게 수용할 수 있다.  

 

2019년 7월 18일 학담(學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