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종교문화경영학-단계와 과정

3. 종교문화경영의 3단계 3) 다이어그램(diagram) 6 - 문화접변과정에서의 문화충돌(文化衝突) (나)

학담(學潭) 2019. 8. 2. 11:08

3) 다이어그램(diagram) 6 - 문화접변과정에서의 문화충돌(文化衝突) (나)



㈏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황사영(1775~1801 세례명 알렉시오 Alexius)은 1790년(正祖 1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정약현(丁若鉉)의 딸(명련 命連, 세레명 마리아)과 결혼했다. 그는 1791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가져온 가톨릭 서적을 보고 영향을 받았으며 가톨릭이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으로 확신했다. 황사영은 당시 관례이자 고유문화로 여겼던 조상제례를 행하지 않아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배척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황사영은 신유사옥(辛酉邪獄)이후 조선의 서로마 가톨릭선교가 크게 위축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세례를 받은 바로 다음 날 1801년 음력 9월 22일(양력 1801년 10월 29일)에 흰 비단에 오늘날 탄원서와 같은 유형의 문건을 작성했다. 그 문건이 널리 알려진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다. 백서의 길이는 62cm, 너비는 38cm이며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字)로 구성되었다. 황사영은 자신이 작성한 백서(帛書)를 조선인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을 통해 청(淸)국의 가톨릭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9월 26일 청국으로 향하던 그의 백서문건이 발각(發覺)되어 압수당했다. 조선 왕조는 긴급수배령을 내렸고 충청북도 제천에 은신(隱身)중인 황사영을 체포했다. 황심과 옥천희가 먼저 처형당한 후 황사영은 1801년 11월 15일(양력 12월 10일) 서소문에서 반역죄로 참형되었다. 1801(신유 辛酉, 순조純祖1)년에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 신유사옥(辛酉邪獄)1)으로 기록되었다. 황사영백서내용의 핵심은 조선의 가톨릭 선교를 위하여 프랑스 황제에게 조선정복(征服)의 필요성을 요청한 것이다. 요청건의 중요 사항은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2)


① 힘이 없는 조선(경제적 궁핍상이 포함됨)은 서양 제국의 동정(同情)을 얻어

   성교(聖敎, 천주교=가톨릭)를 받들고 백성구제를 위해 자본(경제원조)을 얻어야 한다.

②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조선으로 파견할 때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청나라는 청의 종여(從女)를 공주로 삼아 조선 왕과 결혼시켜 청의 부마국(駙馬國)으로 만들어 종순(從順)하게 한다.

③ 조선을 청국의 한 성(城)으로 편입시켜 관리하도록 한다.

④ 선박 수백 척에 정병(精兵) 5~6만 명과 대포 등 군물(軍物)들을 가득 싣고 동국(東國, 조선)을 쳐서 선교(宣敎)의 승인을 강력히 요구한다.  

⑤ 아국(我國; 조선)이 망하여 없어져도 성교(聖敎)의 표는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황사영의 백서는 압수되어 의금부(義禁府)에 보관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고문서(古文書)를 파기할 때 당시 서울교구장인 뮈텔(Gustav Charles Marie Mütel, 1854∼1933, 아우구스티노, 한국명 민덕효 閔德孝)주교가 백서를 입수한 다음에 서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 그 후 뮈텔이 밀서(密書)인 황사영의 백서(帛書)를 불역본으로 번역했다. 백서의 원본은 최근 한국가톨릭의 서울 절두산(切頭山)순교자기념관에 이관(移管)되어 보관되어 있고, 사본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있다. 황사영의 백서는 200장의 영인(影印)본으로 만들어졌고 그 영인본은 교황청을 통해 세계 주요 가톨릭국가에 배포했다고 한다.

황사영의 백서를 읽어본 뮈텔 주교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황사영의 백서가 “음모(陰謀)의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었다고 시인하고, 그로 인해 제기된 박해도 이해할 수 있다”3)고 그의 불역본(拂譯本) 서문에서 밝혔다. 

미국의 한국학 전문가인 브르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황사영의 행동은 ‘종교적 광기’(religious insanity)라고 표현된 것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가톨릭신앙단체의 세력을 등지고 조선왕조를 무력으로 전복시키려고 했던 황사영의 발상은 신앙심의 발로(發露)였다. 하지만 그의 단순 무지한 ‘신앙의 힘’은 조국과 조상 그리고 가족 친지들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다는 결단으로 이어졌다. 절대적 신념체계로 이어진 신앙이란 때로는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는 황사영의 백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는 국가, 국민 그리고 국제적 정세와 연관된 역사적 사건과 내용의 통찰적인 인식, 객관적 사안과, 진실성 등에 충실해야 한다. 한국의 교회사는 신앙단체, 신앙인 그리고 국제적 정세와 연관된 교회사적 사건과 내용의 진실성에 충실해야 하지만 신앙단체와 신앙고백적인 행위가 그보다 더 우선적이다. 그러한 것은 한국교회사가 한국사 보다 상위개념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교회사에서 한국사를 들여다보는 경우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각주

1) 신유사옥이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설명되기도 하나 한국교회사의 안목에서 신유박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표기하는 것은 역사의식보다 신앙의식이 강조된 것이다.

2)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출판사, 서울, 1989, 74쪽 그리고

3) 유홍렬, 『增補 한국천주교회사 上卷』, 가톨릭출판사, 서울, 1991, 168~170쪽 참조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출판사, 서울, 1989, 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