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종교문화경영학-단계와 과정

3. 종교문화경영의 3단계 3) 다이어그램(diagram) 6 - 문화접변과정에서의 문화충돌(文化衝突) ㈐ 황사영백서사건 이후

학담(學潭) 2019. 8. 2. 11:28

㈐ 황사영백서사건 이후


서구 유일신문화의 선교(宣敎) 및 식민지정책은 그리스도교국가의 국가경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위력이 한국의 전통문화와 공동체사회의 많은 부분들을 초토화시켰다. 황사영백서사건 이후 조선왕조는 그리스도교세력에 의해 침공을 당했고 조선의 수많은 양민과 군인들이 사망했다. 그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가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조선에서 발생한 다양한 서로마 가톨릭신앙의 행위와 그리스도교 국가의 조선침공에 대한 조선왕조의 결정과 정책사항들이 한국가톨릭교회사와 한국개신교사에서도 한국 가톨릭(=천주교)의 탄압(彈壓)이자 박해(迫害)라고 기록되었다. 이 단체들도 그렇게 박해라고 말하고 신앙교육의 차원에서 순교정신의 숭고함을 가르치고 있다.


황사영이 처형된 자리가 오늘날 서소문의 공원이자 한국 가톨릭의 성지로 성역화 되었다. 서로마 가톨릭의 영향에 힘입은 한국가톨릭의 세력(勢力)과 재력(財力)이 동원되어 한국의 토양에 가톨릭문화경영을 위한 성역화작업이 구축되었다. 그곳은 신앙인의 성지참배지로 교육되고 있어 가톨릭신자화의 길은 교세와 직결되어 있다.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발생할 그 당시 서로마 가톨릭의 선교정책은 청나라와 일본에게 제재(制裁)를 당하고 있었다. 황사영이 자신의 나라 조선을 정벌해 달라고 청국에 있는 프랑스 신부에게 요청했지만 그 당시에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는 유럽 각지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상황에 처해져 있었다. 외세를 힘입어 자신의 꿈과 희망을 펼치려고 했던 황사영, 그가 참형당한지 39년이 지난 1840년 청나라는 아편전쟁을 치렀다. 이웃나라 청국(淸國)은 외세의 집요하고 억압적인 정책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아편전쟁에 패하자 홍콩이 99년 동안 영국의 공식적인 조차지(租借地)가 되었다.1) 

 그와 같은 국제정세와 국내 상황을 파악한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이 기존의 논리처럼 단면으로만 평가할 수 없음을 알게 해준다. 쇄국정치에 대한 국내의 국가경영정책상황과 그와 연계된 국제적 정치상황 및 종교문화경영은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각도로 분석되어야 마땅하다. 


각주

1) 영국에 의한 아편전쟁과 홍콩의 조차지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 9장 Ⅱ. 종교문화경영의 길, 공동선(共同善)의 실천(實踐)으로 2. 역사인식과 종교문화경영 – 종교(심)성 탐구에서부터 6) 근대화문화의 물결 – 청국(淸國)의 멸망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태동(胎動)참조